살다보는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.
오늘도 또한 그런 경험을 한 날인데, 참 기록을 안하고 넘어가기가 어려운 날이었다.
인디속 회의를 끝내고 쌍문역에 도착하니 시각은 11시경.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과, 내일 부딪치게 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걸어가던 중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. 순간 '어디서 본 얼굴이지...?' 생각하며 지나쳤는데, 아무래도 확실히 아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. 그리고 곧 기억이 났다. 나쁜 사람이었다. 다시 뒤돌아서 그 사람을 확인해봤는데 역시 그 사람이 맞았다. 확실했다. 그 사람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, 나는 기억한다. 순간 잠시 화가 나서 그를 붙잡고 한소리라도 해볼까 했지만, 이내 관두기로 마음 먹었다. 너무나 오래된 일이고, 난 이미 그를 용서하지 않았던가.
8년 전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... 시간당 무려 1400 원이라는(월급으로 받았기에 몰랐지 시간으로 나눠보니 이렇게 나왔다 -_-++ 나쁜 악덕 사장! 생각해보면 사장이 더 나쁜넘임) 저임금으로 노동 착취를 당하던 그 시절 그 남자가 pc방을 찾아왔다.
문을 열고 들어온 그 사람은 정장에 말끔했지만 뭔가 굉장히 다급한듯 나에게 여러가지 사정 설명을 했고,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. 자기가 가진 반지며 시계며 풀어주며, 이것을 담보할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.
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그 시절에도 그 사람이 의심스럽긴 했다. 그런데,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고 간절하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그래도 진실되어 보였다. 그러니까- 말이 진실된게 아니라 돈이 필요한게 진실되어 보였다...
-_-^ 별 수 있나, 이유는 모르겠지만 담보까지 제시하는데 모른체 하긴 그랬다. 그래서, pc방 카운터에 있던 일부 금액을 쥐어줬다. 근데, 그 돈을 받고 그 남자, 표정이 상당히 안좋았다. 당시엔 몰랐는데, 나중에 생각해보니 담보에 비해 금액이 적어서 그랬던 것 같다. 어쨌든,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는지 그냥 돈을 받아서 나갔다. 물론, 정산 전에 돌려준다는 이야기는 했다.
뭐,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. 덕분에 pc방 사장으로부터 한소리를 들어야했고, 이렇게 될걸 예감했던 나는 준비했던 대사인 '제 월급에서 제하세요' 라고 대답해줬다. 항상 돈에 겨웠던 pc방 사장은 얼마 안되는 돈 때문에 나의 제안을 무시하지 못했고, 잔소리 역시 더 이상 하지 못했다. 난 속으로 그런 pc방 사장을 경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.
꺼낸김에 pc방 이야길 조금 더 하자면, (여기서 끊으려니 감질맛난다...) 그 뒤로도 나는 곰처럼 두달을 더 일했다. 어느날 난 장시간의 근무 시간에도 식대는 물론 밥을 먹을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 사장에게(라면도 없었고, 싸구려 도너츠만 두개 공짜로 주었다) 식사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제안했고, 그 몇일 뒤에 사장은 시골에서 조카가 올라와서 나 대신 일해야 한다며 갑작스레 해고를 통보했다. 그만둬야 하는 당일 벌어진 일로, 퇴근시간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건 정말 기분좋지 않았다.
그래도 그동안 정든 단골 손님도 있었고, 그리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친해진 외국인도 있었다. 인사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.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 사장이 알리가 없지. 여튼, 그렇게 난데없는 해고를 당하고 나는 내가 요구한 권리 때문에 같지않은 핑계를 대서 날 쫓아낸줄 알았다.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. 우연히 근처의 다른 pc방에서 그동안 알바했던 pc방의 단골손님을 만나게 되었는데, 듣자하니 조카가 대신 일한게 맞긴 한듯하다. 문제는, 그 조카가 너무 일을 대충하고 불친절해서 pc방을 옮겼다고 하는 것이다. 하핫. 이런 일이! 그리고 그 pc방은 6개월이 안되어 폐업했다.
여튼... ;;
그때 나에게 같지 않은 소리를 하고 돈을 빌려간, 아니 맘먹고 떼어간 그 남자를 다시 만난것이다. 그때도 젊어 보이진 않았지만, 이젠 흰머리도 듬성듬성 있는 것이 세월이 느껴졌다. 슈트 차림인건 여전했고. 뭐,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 그냥 그 정도만 관찰하고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걸었다. 하늘색 바탕에 흰 가로 줄무늬 티셔츠와 말총 머리를 하고 안경을 쓴 어떤 여인의 뒷모습(오래 전 함께 일했던 맘씨 좋은 경욱씨의 이미지랑 거의 비슷했다)도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는 못했던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. (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ㅋㅋ)
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나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내 머리가 대견했다. 생각해보면, 그때도 5월경이었던 것 같다. 정말 딱 8년만이다.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툭 치며 불렀다. 향숙이었다. 오늘의 두 번째 조우인가.
회식하고 퇴근하는 길이라는 그와 스터디 이야기 등을 나누며 묘했던 기분은 완.전.히 사라졌다. 참 좋은 타이밍에 만나는구나 생각하며. 그래서 고마운 그에게 하드디스크 하나를 주기로 했다. (보통은 먹는걸 선물하지만... 하드디스크를 선물한다고 썼더니 뭔가 어감이 -_-;;) 무슨 이유인지 모를 그는 마냥 좋아하기만 했지만... 헤헷.
하고 싶은 말이 많은 밤이다. 오늘 낮엔 꽤나 센치해졌었는데...
비가 갠 오후에 흙 냄새와 아카시아 냄새는 꽤 좋았다. 나중에 그 이야길 써야지. 이제 해야 할 일을 하고 3시 이전엔 수면에 들어가는 거닷!